다이애나 차가운 달의 분노

“나는 달의 영혼 속에 흐르는 빛이다.”

다이애나는 오늘날 거의 사멸된 고대 종교 ‘루나리’의 전사이자, 은빛 달의 화신 그 자체다. 그녀는 드높은 타곤 산 꼭대기에 떠오른 천체들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겨울 밤 설원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갑옷과 초승달 검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인간을 초월한 그녀의 힘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다. 다이애나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쓰고 있다.

다이애나의 부모는 본래 타곤 산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낯선 산이 나오는 기이한 꿈을 꾸고, 꿈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타곤 산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임신한 여자의 몸으로는 더욱이 버틸 수 없었다. 동쪽 산등성이에서 폭풍을 피하던 그들은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차갑고 무자비한 달빛 아래에서 여자가 마지막 숨을 내쉰 순간, 다이애나가 세상에 태어났다.

다음날 폭풍이 잦아들고 태양이 중천에 떴을 때, 근처의 솔라리 사원에서 나온 사냥꾼들이 다이애나를 발견했다. 아기는 곰 가죽에 감싸인 채 죽은 아버지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그들은 아기를 사원으로 데려가서 태양의 세례를 내리고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곳에서 다이애나는 타곤 산을 지배하는 종교인 솔라리의 일원으로 길러졌다. 태양 숭배 사상과 신화들을 배우고, 솔라리 사원의 성전사들인 라호락 전사단과 함께 전투 훈련을 받으면서, 그녀는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의 소녀로 성장했다.

솔라리 원로들은 세상의 모든 생명이 태양으로부터 나왔다고 가르쳤다. 반면 달빛은 어둠을 교묘하게 꾸며낸 거짓된 빛이라서 아무런 자양분도 주지 못한다고, 오로지 어둠의 짐승들만이 달빛에 의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어쩐지 달이 태양보다 더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혹독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비하면, 그윽한 달빛이 오히려 훨씬 더 아름다운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매일 밤 달이 나오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곤 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숙소를 몰래 빠져나가 산을 올라갔고, 달빛을 받아 은색을 띤 샘물을 구경하거나 밤에만 피는 꽃들을 꺾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이애나는 점점 더 원로들에게 반항심이 들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는 모조리 의문투성이로만 느껴졌고, 그 이면에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원로들이 일부러 알려주지 않고 숨기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나이가 들수록 신랄하고 비판적인 학생이 되어갔고, 그녀가 교단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자 어릴 적 친했던 친구들조차 그녀와 멀어져갔다. 외톨이가 된 다이애나는 나날이 고립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힘든 것은 자신의 삶에서 필수적인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는 듯한 갈증이었다. 밤이 되어 아득히 먼 산봉우리 위로 떠오른 은빛 달을 올려다볼 때면, 저 봉우리로 올라가고 싶다는 열망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가려움증처럼 그녀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런 짓을 했다가는 죽음보다 끔찍한 파멸을 맞게 될 거라는 가르침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원로들은 오로지 존귀한 영웅들만이 타곤 산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누누이 가르쳐왔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애나는 원로들과 말싸움을 벌인 죄로 사원의 도서관을 청소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청소를 하다 보니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낡은 책장 뒤에서 빛 한 줄기가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책장 뒤편의 좁은 공간을 뒤져보니, 그곳에는 일부분이 불탄 고대 필사본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다이애나는 청소를 끝낸 뒤 그걸 가지고 밖으로 나갔고, 그날 밤 보름달 아래서 전부 읽었다. 그러자 잠겨 있던 영혼의 문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필사본은 ‘루나리’라는 사라진 종교에 대한 기록이었다. 일부분이 훼손된 탓에 전체 내용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남은 부분으로도 대략적인 지식은 얻을 수 있었다. 루나리는 달이 생명과 균형의 근원이라고 믿는 종교였으며, 밤과 낮, 해와 달의 영원한 순환이 우주의 조화를 지탱한다는 것이 그들의 핵심 교리였다.

루나리의 필사본을 탐독한 다이애나는 큰 깨달음을 얻은 기분에 휩싸여, 달빛이 비치는 밤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사원 담장 너머로 곰 가죽 망토를 두른 어떤 나이 든 여인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녀는 산꼭대기로 이어지는 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여인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다가 버드나무 지팡이로 땅을 짚고서 겨우 바로 서더니, 다이애나를 보고는 도와달라고 외쳤다. 날이 밝기 전에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니 부축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건 솔라리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여인을 도와서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싶다는 열망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이애나를 사로잡았다. 이 산은 오로지 귀한 자에게만 길을 열어준다지만, 사실 다이애나는 세상 그 무엇도 귀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인이 다시금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다이애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담장을 기어넘어가서 여인의 팔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산을 올랐다.

가까이에서 보니 여인은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이런 노인이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만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후로 더더욱 험난한 고산지대가 펼쳐지는데도 여인은 별로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그녀와 함께 몇 시간이나 등반을 계속했다. 구름보다 더 높은 고도에 이르렀을 때부터는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워졌고, 하늘의 달과 별들은 다이아몬드처럼 맑게 빛났다. 다이애나는 지쳐서 비틀거렸고 산소가 부족해서 숨 쉬기도 힘겨워했지만, 늙은 여인은 오히려 다이애나를 일으켜주고 격려해주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시간 감각이 점점 흐릿해졌다. 머리 위로 흘러가는 별들과 눈앞의 산길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흐릿해 보였다. 다이애나는 이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휘청거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창백한 달빛에 힘입어 겨우 기운을 짜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아예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결국 그녀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고 말았다. 온몸이 녹초가 되다 못해 한계 이상으로 소진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눈을 들어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그곳은 이미 산꼭대기였다. 하룻밤 만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정상에 벌써 도착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봉우리 주위의 하늘은 환영 같은 신비로운 색채로 온통 물들어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찬란한 빛의 베일 너머로 금색과 은색으로 반짝이는 대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다이애나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옆에 있어야 할 동반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 늙은 여인의 흔적이라고는 다이애나의 어깨에 걸쳐진 곰 가죽 망토 한 장뿐이었다. 다이애나는 하늘의 빛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를 줄곧 괴롭혔던 공허감이 채워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상도 못할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받아들여줄 거라는 예감이 밀려왔고, 이게 바로 자신이 평생 기다려왔던 순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싱그러운 생기가 몸을 타고 돌면서 번쩍 기운이 났다. 다이애나는 일어나서 저 경이로운 빛으로 가득한 하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한 발짝씩 나아갈수록 그녀의 결심은 확고해졌다.

그때 하늘의 빛이 그녀를 향해 밀어닥쳤다. 다이애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무언가 거대하고 강력하고 초월적인 고대의 존재가 자신과 융합되고 있었다.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희열이 샘솟았다. 순간이면서 동시에 영원 같고, 진실이면서 동시에 환각 같은 경험이었다. 마침내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다이애나는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린 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런 아픔은 난생 처음이었다.

다이애나는 비몽사몽으로 산을 내려갔다. 주위에 뭐가 있는지 보지도 않고 무작정 발을 옮겼다. 그러다 보니 어느 바위 벽 앞에 이르렀는데, 그 표면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깊은 틈이 나 있었다. 그건 달그림자가 지는 밤이 아니면 육안에 보이지 않는 동굴 입구였다. 추위를 피해 쉴 곳이 필요했던 다이애나는 동굴에서 노숙해야겠다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의 비좁은 통로를 따라 조금 걸어 들어가자 탁 트인 널찍한 공간이 나왔다. 먼 옛날에 예배당이나 알현실 같은 곳으로 쓰였던 곳 같았다. 허물어져가는 벽에는 빛바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혜성들이 비처럼 쏟아져내리고, 금색과 은색의 전사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서 기괴한 괴물들과 싸우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 방 한가운데에는 초승달 모양의 검과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형태의 갑옷 한 벌이 놓여 있었다. 아름답게 세공된, 광택이 흐르는 강철 판금과 은사슬을 엮어 만든 갑옷이었다. 다이애나는 반짝이는 갑옷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칠흑 같던 머리카락이 순백색으로 변한 상태였고, 이마에는 눈부시게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룬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룬문자는 갑옷 철판에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과 같았고, 뿐만 아니라 도서관에서 발견한 필사본에도 똑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던 것을 본 기억이 났다. 다이애나는 자신이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이 운명을 받아들이든지, 물러나든지 둘 중 하나였다.

다이애나는 손을 뻗어 갑옷의 서늘한 표면을 만져보았다. 그러자 자신이 살아본 적 없는 삶들, 겪어본 적 없는 기억들, 알지 못하는 감각들이 머릿속에서 폭발하듯 솟구쳤다. 고대 역사의 파편들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치고, 어렴풋하게 알 듯 말 듯한 비전의 지식들과 무수한 미래의 장면들이 바람에 날려온 먼지처럼 마구 흩날렸다.

환상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다이애나는 은색 갑옷으로 완전히 무장하고 있었다. 갑옷은 맞춘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그녀는 새로운 지식들이 안겨준 충격과 감격으로 아직도 마음이 먹먹했지만, 그 지식들 자체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아서 답답했다. 마치 절반이 그림자에 가려진 그림을 보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자신이 무언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은 분명했다. 그녀는 여전히 예전의 다이애나였지만, 동시에 예전의 자신을 뛰어넘은 불멸의 존재이기도 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찬 다이애나는 동굴을 나와서 곧장 솔라리 사원으로 향했다. 새롭게 얻은 깨달음을 원로들에게 알려줄 작정이었다.

사원의 입구에서 다이애나를 맞이한 사람은 레오나였다. 라호락 성전사단의 단장이자 솔라리 최고의 전사인 그녀는 다이애나를 원로들의 방으로 데려다 주었고, 다이애나가 원로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함께 그 말을 들었다. 루나리에 대한 이야기가 다이애나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자 레오나는 기겁한 눈치였다. 원로들은 기겁한 정도가 아니었다. 다이애나가 말을 마치자마자 원로들은 그녀를 이단자, 신성모독자, 미신을 퍼뜨리는 선동꾼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런 극악무도한 죄악에 내려야 할 처벌은 오로지 사형뿐이라고 판결했다.

다이애나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원로라는 자들이 이처럼 명백한 진실을 부인할 수 있나? 다른 곳도 아닌 이 성스러운 산의 정상에서 받은 계시를 그들이 어떻게 감히 외면한단 말인가? 분노와 좌절감에 북받친 그녀 주위의 허공에서 은빛 불덩이들이 나타났다. 다이애나는 악에 받혀 고함을 지르면서 무턱대고 검을 휘둘렀다. 검날이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치명적인 은색 불꽃이 일어나는 게 보였지만, 그녀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를 뿐이었다. 그러다 겨우 분노가 진정되고 보니 눈앞에 끔찍한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원로들은 모두 죽었고, 의식불명으로 쓰러진 레오나의 갑옷은 지금 막 대장간에서 나온 것처럼 김이 피어올랐다. 자기가 한 짓에 질겁한 다이애나는 그곳에서 즉시 도망쳤다.

다이애나가 벌인 잔인한 학살극을 발견한 솔라리의 신도들은 경악에 빠졌고, 라호락 전사들이 그녀를 처단하기 위해 추적에 나섰다. 한편 타곤 산의 야생으로 숨어든 다이애나는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썼다. 루나리의 진실들은 절반밖에 기억나지 않았고, 고대의 지식은 어렴풋한 파편들로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루나리와 솔라리가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순한 전사의 삶보다 더 중대한 운명을 타고났다. 그 운명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알아낼 것이다.

밤의 할일

밤의 할일

다이애나는 늘 밤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솔라리 사원의 담장을 기어올라가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달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지금도 그녀는 보랏빛 눈동자로 은색 달을 열심히 좇았다. 하지만 울창한 숲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짙은 구름과 검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흐릿한 빛만 새어들 뿐이었다.

걸어가면 갈수록 나무들이 점점 더 빽빽해졌다. 이끼로 뒤덮인 시커먼 나뭇가지들이 뒤틀린 팔을 내뻗듯 하늘로 뻗쳐 올라갔다. 숲길은 무성한 수풀과 찔레덤불에 막혀버렸고, 달빛도 잘 들지 않아서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그녀의 갑옷을 긁어대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이애나는 눈을 감고서 머릿속의 기억에 의지해 앞길을 더듬었다. 다이애나 자신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공유하는 어떤 미지의 존재가 지닌 기억의 조각들 중 하나였다.

눈을 떠보니, 그녀 앞에 펼쳐진 빽빽한 숲의 풍경 위로 또 다른 숲의 잔상이 아른아른 겹쳐져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 숲의 예전 모습이 보였다. 나무들이 더 어리고 생기 넘치던 시절, 가지마다 열매가 맺히고 들꽃이 피고 오솔길에 빛이 아롱지던 시절의 모습이.

다이애나는 평생 험하고 황량한 타곤 산에서만 살아왔다. 저렇게 온화한 숲의 풍경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보이는 저 환상이 타곤 산의 과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풍경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인동덩굴과 재스민의 짙은 향기까지도 생생하게 맡아졌다. 그 시절의 숲이 온전히 되살아난 것처럼.

“고마워.” 다이애나는 그렇게 속삭이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고대의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솔길은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과 시들어가는 나무들 사이로 구비구비 이어졌다. 모두 오래 전에 이미 죽었을 고대의 나무들이었다. 다이애나는 바위투성이 언덕, 소나무와 전나무 숲, 세차게 흐르는 시냇물을 지나, 깎아지르듯 가파른 절벽을 휘감는 비탈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마침내 탁 트인 고원에 이르렀다. 저 밑으로는 거대하고 차디찬 검푸른 빛깔의 호수가 내려다보였다.고원 한가운데에는 높다란 거석들이 원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저마다 나선이며 곡선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문자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낯익은 문자가 눈에 띄었다. 다이애나의 이마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룬 문자와 똑같은 문자가 모든 거석에 새겨져 있었다.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다. 다이애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이곳에서 난폭하고도 위험한 마법과 맞닥뜨릴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녀는 거석들을 향해 다가가면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했다.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이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매우 위협적이면서도 친숙한 존재들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거석들로 이루어진 원 안의 중심부에 서서 검을 뽑았다. 초승달 모양의 검날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창백한 달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검 끝을 땅에 대고 무릎을 꿇어 앉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그때 공기가 흔들렸다

기압이 뚝 떨어지고, 공기 중에 어떤 기운이 스미는 것이 느껴졌다.

다이애나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석들 사이의 시공간이 찢어지면서 괴물 세 마리가 튀어나왔다. 상아색 피부에 뼈처럼 새하얀 갑각류의 껍데기가 덮인 괴물들이었다. 놈들은 소름끼치는 괴성을 내지르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녀에게 달려들어 강철 발톱을 휘두르고 이빨을 들이댔다.

공포.

다이애나는 재빨리 몸을 숙여 피했다. 그녀를 물어뜯으려 했던 괴물의 반질반질한 흑단 같은 이빨이 딱 하고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다이애나는 머리 위로 검을 휘둘러 그 괴물을 베었다.

한 바퀴 굴러 일어서보니, 남은 괴물 두 마리가 이리떼처럼 다이애나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그녀가 든 검을 이제야 알아보고 경계하는 눈치였다. 아까 다이애나가 벤 괴물은 삽시간에 몸 전체가 녹아내려서 부글부글 끓는 타르 웅덩이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놈들이 다시 덤벼들었다. 양편에서 동시에 달려드는 괴물들의 살이 어느새 검푸른 빛깔로 변색된 게 보였다. 본래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라, 이곳의 공기가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죽은 괴물의 잔해를 뛰어넘으면서, 루나리의 성스러운 구절을 외치며 검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검날에서 눈부신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섬광에 직격당한 괴물의 몸뚱이가 파열되었다. 다이애나는 마지막 괴물의 공격을 피하려고 몸을 옆으로 젖혔다. 그러나 한 발 늦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강철 갑옷의 가슴받이를 파고들더니 그녀를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놈의 가슴이 입처럼 쩍 갈라지면서, 그 안에 뒤엉켜 있는 점액성 감각 기관들과 구부러진 이빨이 드러나 보였다. 놈이 그 이빨로 다이애나의 어깨를 베어 문 순간, 뼛속까지 마비될 듯한 차가운 감각이 온몸에 쫙 끼쳐올랐다. 다이애나는 비명을 지르며 검의 자루를 단도처럼 고쳐 쥐고서 괴물을 찔렀다. 그러자 놈이 괴성을 내뱉으면서 다이애나를 놓아주었다. 검에 찔린 부위에서 끈적거리는 검은 액체가 쏟아져나왔다.

다이애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그녀가 초승달 검을 옆으로 내뻗자, 하늘에 짙게 끼었던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그녀의 피 맛을 본 괴물은 더 먹고 싶다는 듯 탐욕스럽게 그르렁거렸다. 그 몸뚱이는 이제 완전히 검은색과 자주색으로 변해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놈의 몸에서 삐죽삐죽한 톱날이 달린 두 팔이 뻗어나오더니, 팔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수많은 갈고리와 발톱으로 변했다. 그리고 살갗이 액체처럼 꾸물꾸물 움직이면서 상처 부위가 저절로 재생되었다.

다이애나는 속이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안에 깃든 미지의 존재가 아주 먼 옛날부터 품어온 증오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눈앞에 어떤 환영이 보였다. 그건 고대에 일어났던 끔찍한 전쟁의 기억이었다. 그 전쟁 때문에 온 세상이 무너질 뻔했다. 하마터면 지금의 바로 이 세상마저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릴 뻔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이 세상은 그런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괴물이 다이애나에게 달려들었다. 그 몸에서 이계의 에너지가 물결치듯 흘러넘쳤다. 그때 하늘의 구름들이 완전히 흩어지면서 찬란한 은색의 빛줄기가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그 광선을 빨아들인 다이애나의 검이 밝게 빛났다. 그녀는 밤의 빛으로 가득한 그 검을 처형인처럼 내리쳐, 괴물을 단칼에 베었다.

눈부시게 폭발하는 섬광 속에서 괴물은 그 즉시 분해되었다. 놈의 몸뚱이는 밤 공기 속에 완전히 사라졌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진 벌판에 다이애나 혼자 남았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면서 몸을 추스르는 동안, 지금껏 그녀와 한 몸이 되어 움직였던 미지의 존재는 어딘가 더 깊은 곳으로 물러났다.

어느 텅 빈 도시의 환영이 눈앞을 스쳤다. 한때는 생기로 가득했던 도시가 적막하게 변해버린 풍경이었다. 다이애나는 그 도시가 어디인지도 모르는데도 불현듯 슬퍼졌다. 그러나 슬픔의 근원을 되짚어볼 새도 없이 환상은 희미해지다가 이내 사라져버렸다.

괴물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거석들이 모두 은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장소의 다른 차원에 존재했던 사악한 존재의 숨결이 제거되고 나니, 거석들에 깃들어 있던 본래의 치유력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 치유력이 땅 전체에 퍼져나가면서 바위들과 나무 뿌리들을 적시고 지하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밤의 일은 끝났군. 이 통로는 봉인되었다.”

다이애나는 저 아래의 호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수면에 비친 달이 그녀에게 손짓하듯 어른거렸다. 그녀의 몸과 영혼을 모두 끌어당기는 듯한, 못 견디게 강렬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내일 밤에도 할 일은 있는걸.” 다이애나는 누군가를 달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